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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박학순 한국작물보호협회 이사

농업 생산 책임지는 작물보호제 재조명 필요

관행농과 유기농 서로 존중해야 한다

잘 난 아들은 국가의 아들이고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이며 빚 많은 아들은 내 아들. 가담항설(街談巷說)이다. 우스갯소리로 그저 조크에 불과하지만 마냥 허투루 들을 수만 없는 의미 있고 공감이 많은 풍자다.
작물보호제인 농약. 그는 분명 잘 난 국가의 아들이다. 그저 사유하고 싶지만 마냥 사유 할 수 없는 국유의 아들이다. 또 그래야만 한다. 풍요의 시대인 양 오인하는 세간의 시기와 질투에 의해 파생되는 작물보호제의 고난과 역경은 작금의 일이 아니다. 그런 속에서도 오롯이 생명줄인 먹거리를 책임지는 잘 난 아들이 바로 작물보호제다. 먹거리는 다양한 기술과 농법에 의해 조달이 가능하지만 굳이 경중을 논하자면 제일이고 으뜸이라는 얘기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성현의 말씀은 이젠 고어에 불과하다. 곳간에서 나는 것이 비단 인심뿐이겠는가? 권력, 도덕, 명예, 관용, 사랑, 포용 등 어느 것 하나 경하게 넘길 수 없는 소중한 행위들이며 품위이지만. 이는 곧 먹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먹는 문제는 특정 철학이나 가치, 비전에 의해서만 가능하지 않다. 해결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바로 실체이고 현실이다.


지금이야 잠잠해졌다 하나, 최근 방송된 공영방송의 유기농 관련 프로그램으로 인해 한때는 제법 어수선했다. 초기 알려진 수위(水位)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맹목적 친환경 유기농법 및 부류 농산물의 허와 한계를 볼 수 있었음은 소득이고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관련 업계 및 단체, 학계 등에서는 이곳저곳에 나름의 가치와 사고를 바탕으로, 또 나름의 논리와 억울함으로 무장된 견해를 보내며 애써 항변을 멈추지 않았다. 잘못된 친환경유기농의 꼼수가 다수가 아닌 일부 몰지각한 소수의 그릇된 관행임에도, 전부인 양 보도 됐다는 군색한 논리다. 그들의 주장대로 과연 그런 일탈행위가 일부에 국한하는 것일까? 보조금의 멍에를 눌러 쓴 도덕과 양심의 시력을 잃은 자들의 탐욕이 그저 특정 개인에만 한하는 문제일까? 설령 그렇다 치자.


“농업은 농법과 무관하게 명예롭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들은 작물보호제의 극히 일부 오ㆍ남용의 부작용을 끊임없이 재탕 삼탕 우려내며 탐닉해 왔다. 작물보호제 본연의 문제가 아닌 일부의 오ㆍ남용에 의한 부작용에 편승해 온갖 영화를 누리거나 누리려 했다. 그러면서도 작물보호제의 우수한 힘은 결코 포기하거나 놓으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작물보호제 없는 고난과 현실의 역경을 인정하는 게 어떨까? 자급자족을 위한 유기ㆍ무농약 농법은 그 자체로서 영위하면 되는 것이다. 나름의 가치와 철학, 비전이 있다면 공유하면 그뿐인 것이다. 굳이 작물보호제를 폄하ㆍ폄훼하며 몹쓸 것인 양 국민을 호도하고 부도덕한 상득(商得)을 위해 에너지를 허비하지 말았어야 했다.


국가발전의 기회를 얻을 때마다 농업희생은 그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여겨졌고, 짧지 않은 언제부터인가 90%를 훌쩍 넘는 관행농가들의 안위 또한 따뜻한 정부정책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들길을 걷고 있다. 가슴 아픈 현실이다. 농업을 비추는 화려하고 내실 있는 조명은 늘 실리보다 명분을 좆는 소수농법에 맞춰져 있었다. 진단이 없어서가 아니다. 처방을 내리는 선구자가 없어서다. 분명한 이치는 생명창고의 빗장을 거머쥔 농업이야말로 농법과 무관하게 명예롭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일 게다.


한국 유기농, 농약 공포로 성장
“한국의 유기농은 농약과 화학비료 공포를 먹이로 성장하였다. 스스로 선한 먹거리가 되려고 일반농을 ‘악의 축’이나 되는 듯이 굴었다”는 어느 저명인의 지적을 허투루 들어서는 도루묵이요 제 자리 걸음일 뿐이다. 물론 그간 작물보호제가 걸어온 노정이 항상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저 먹을 것이 절실했던 시절,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야 했던 단견(短見)이 유인해 낸 불찰(?)도 없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그렇다 해도 배척점에 선 그들은 늘 작물보호제의 극히 일부에서의 부작용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기에 모든 지혜를 모았고 대부분의 언론 또한 그런 그릇됨과 어리석음을 조명하지 못하고 부화뇌동하는 길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작물보호제에 대한 오늘날의 막연한 두려움과 부정적 인식이 불식되지 못했다면 억측(臆測)일까?


변화무쌍한 작물보호제 산업은 극히 일부의 부작용과 맞서며 그들의 일탈을 멈추고 불식시키기 위해 수 십 년 동안 노력하고 인내해 왔다. 작물보호제라는 잘난 아들이 그간 얼마나 많은 시기와 질투를 관용하고 그런 속에서 성장해 왔는지 이제는 알려져야 한다. 아니 알아야 한다.


작물보호제의 역할과 중요성을 크게 공감하고 인정하면서도 현실적 존재를 부정하고 막연히 두려워했던 세간의 이목이 얼마나 차갑고 힘든 벽이었는지 그들은 모른다. 이젠 모두가 냉정해져야 한다. 우리의 먹거리 현실이나 일선 농업여건이 어떤지 냉철히 뒤돌아보아야 한다.


23%대의 곡물자급률이란 시한폭탄을 품고 사는 우리다. 과연 첨단 정밀화학제품인 작물보호제의 실체를 부정하며 먹거리의 안정적 공급을 위협하고, 힘든 들녘을 누비시는 고령 노부모에게 여전히 뙤약볕 중노동을 강요할 것인지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빙탄(氷炭)의 농법’인 유기와 관행농은 그 자체로서 서로를 인정해야 양립(兩立)이 가능하다.


인류생존을 부정하는 농법으로 유기농법을 지목했던 외국의 저명한 학자가 사뭇 그리운 즈음이다. 식량의 무기화는 당장은 아니어도 늘 그리고 크게 상존함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안정적 먹거리를 지켜 내는 일은 곧 국방이다. 먹거리의 국방의무를 다하는 대다수 관행농법을 폄훼하고 유기농법의 허와 한계를 직시하지 않는 한 그나마 보유한 나름의 의미마저 퇴색되어 전근대적, 망국적, 상업적 농법이라는 오명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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