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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배고픔 해결이 농산업계 시작… 종자개량, 비료 무상공급

농업기술 연관된 농자재산업 인식 전환

 농산업계 원로에게 듣는다 _  대유 권옥술 회장 ① 






농기자재신문이 창간 9주년을 맞이해 농산업계를 이끌어 온 원로 경영인과 만남의 장을 마련했다.
어려웠던 시절을 극복하면서 업계는 물론 국내 농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헌신해 온 원로 경영인에게 과거와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지혜를 듣기 위함이다. 농산업계는 배고픔을 일상으로 달고 살던 시절을 극복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제는 국내를 넘어 해외시장에 국내 우수 농자재가 진출할 만큼 괄목 성장까지는 업계원로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첫 주인공으로 (주)대유 권옥술 회장의 얘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돌이켜보면 60~70년대 무렵만 해도 배고픈 사람 배 안고프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특히, 5.16 이후 박정희 대통령 집권시부터 최우선 사항이 식량증산이었다. 그때부터가 본격적으로 농산업계가 태동했던 시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당시는 어렸을 때인데도 학교 다니면서 야산을 개간하고 퇴비 만들기 등 일상적인 활동도 증산을 위한 활동으로 채워졌다. 심지어 어린 학생들의 방학 숙제로 퇴비를 만들어오게 할 정도였다.”


비료 보급해도 쓸줄 모르던 시절
모내기 등 본격적인 영농철이 한창이던 지난달 22일 (주)대유 본사에서 만난 권옥술 회장은 농기자재 산업의 태동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활동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5.16 당시에 4번째 혁명공약으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고 표현할 정도로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권 회장은 “식량증산을 위해 당시는 누구라도 호미 들고 삽 들고 야산 개간하러 다니고 그랬다. 거기에 옥수수 심고 콩 심고 날이 가물어 물대고 콩 심고 그랬다. 할아버지 밥그릇에 쌀밥 조금 담고 나머지는 다 보리밥이었던 보릿고개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농업에 엄청나게 신경 썼다는 것.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때 당시 먹고 사는 게 최우선이었으니까.
권회장은 “보릿고개를 헤쳐나가기 위해 종자개량·비료산업화가 태동하기 시작하고, 지원이 늘기 시작했다”며 “그때부터 농업기술과 연관된 농자재산업인 각종 종묘, 농기계 등 농산업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정부에서 보조를 많이 했다. 무상으로 요소비료·복합비료 등 식량증산을 위해 보급하기 시작했으나, 당시 농민들은 그러한 농자재를 잘 쓸 줄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퇴비농업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상전벽해…
증산위해 비료 및 농약 장려

권 회장은 “식량자급을 목표로 대규모의 비료공장 건설이 추진되면서 비료 공급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며 “특히 정부주도로 울산에 영남화학과 한국비료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요소비료 등을 생산해서 무상공급량을 늘렸지만, 전국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했다. 겨우 50%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비료 공장 설립 현황을 보면 1961년 충주(충주비료, 제1비), 1962년 나주(호남비료, 제2비)에 년산 8만5000톤 규모의 요소비료 공장이 준공됐고, 1967년 영남화학(제3비)와 진해화학(제4비)를 건설됐다. 비스한 시기에 조선비료 및 경기화학 등 민간 공장도 꾸준히 증설됐다.
 또 “당시 비료가 한 포에 만원짜리 같으면 정부에서 5000원은 보조할 정도로 지원이 확대되는 시기였다”며 “비료는 마을 이장으로부터 신청 받아서 농협을 통해 공급했다. 당시 우리집에 열 포 필요하면 다섯 포만 들어왔다”고 술회했다. 또한 “당시에도 시판상이 있었으나 취급을 못했다. 비료는 오로지 농협을 통해서만 공급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공급량이 원활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가 관리를 강화한 것이다.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기질비료의 계통구매 방식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뿌리가 거기에 닿아 있다.
이후 비료 생산이 늘면서 1970년 중반부터 비료는 판매자유화가 됐다. 누구든지 신고만 하면 비료를 판매할 수 있게 제도도 변화했다. 식량 증산을 위해 통일벼가 보급됐다. 하지만 통일벼는 수확량은 많았으나 병해에 약했다. 그러다보니 병해를 극복하기 위해 농약 생산이 장려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작물보호제(농약)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권 회장은 “농산업은 작물보호제보다 비료가 먼저 시작됐으며, 병해충 문제가 생기면서 농약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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