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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비료 무상공급 초기 사용법 몰라 벼 웃자라고 넘어지기 비일비재

농가 직접 찾아다니는 판매방식 도입… 농민과 공감대 넓히며 후발주자 한계 극복


농기자재신문이 창간 9주년을 맞이해 식량증산과 농업경쟁력 제고에 일등공신 역할을 해온 ‘농산업계 원로에게 듣는다’란 지면을 신설해 연재하고 있다. 농산업계 원로들은 배고픔이 일상이던 어려웠던 시절을 극복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며 현재의 농산업을 있게 한 산증인이다. 또한 오늘날의 국내 농기자재산업이 해외로 진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는데 이들의 헌신이 있었기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재의 첫 주인공으로 (주)대유 권옥술 회장의 얘기를 두 번째 싣는다.  <편집자 주>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절대 기아선상이던 시 절에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최 우선이었다. 식량증산을 위해 대형 비료 공장 이 증설되면서 농기자재산업은 비로소 날개 를 달기 시작했다. 비료 공급은 정부의 힘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권옥술 회장은 “6~70년대만 해도 농업은 퇴 비를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화학비료가 공급 되기 시작했으나, 효과에 대해 처음에는 반 신반의는 물론 평가절하 되기 십상이었다”며 “또한 사용법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 에 이에 따른 문제도 많았다”고 했다. 


비료를 조금만 주어도 될 것을 많이 주면 효 과가 크다고 생각해 농가마다 규정량보다 더 많이 줘서 벼가 웃자랄 뿐만 아니라 도복되는 것이 비일비재 했다는 것. 권 회장은 “개념도 없을 시절이라 그런 시행착오 가 많았지만 몇 년 지나면서 학습효과를 통해 정 착하게 됐다”며 “아마 그게 십여년 간 반복됐을 것이다.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 을 많이 했는데 쉽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관습 은 하루 이틀에 바뀌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비료산업 비약발전 속 나타난 단점이  친환경비료 성장 계기 만들어 

비료는 요소비료가 먼저 보급된 다음으로 복 합비료가 나왔다고 한다. 권 회장은 “원래 비료는 요소·인산·가리 따 로 있었다. 따로 뿌려야 한다. 그러다보니 시 비 양을 제대로 조절 못하니 부작용이 생기기 도 했다”며 “그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복합 비료가 나오기 시작했으며, 법령이 정비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비료는 1종이 요소비료·인산비료·가리비료 이고 2종이 요소에다가 인산을 섞느냐·가리 를 섞었느냐에 따라 구분됐다. 3종은 세 가지를 섞은 것이었고, 이어 4종까 지 나오면서 비료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 는 전기가 마련됐다고 했다. 


권 회장은 “시행착오 속에 농촌지도소 공무원 들이 농민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정부에 건의하는 등 의식이 있는 공무원들의 노력이 복합비료 탄생의 계기가 됐다”며 “이후 다양 한 비료가 보급되면서 농민들은 쓰기가 훨씬 편해졌을 뿐만 아니라 부작용도 현격하게 줄 어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보급된 비료가 식량증산 등 농업경쟁력 을 한단계 상승시키기도 했지만, 토양오염 등 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극복 하기 위해 나오고 있는 것이 친환경비료 등 친 환경자재 출시 배경이 되고 있다고 했다. 


권 회장은 “현재도 그렇지만 친환경 농업쪽으 로 큰 흐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을 유념할 필요 가 있다”며 “화학제품은 장점이 많이 있지만 단 점도 있고, 편리함만큼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토양이 나빠지는 것을 개선하기 위한 제품이 많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또한 “다른 한편에 서는 친환경 자재를 육성하려는 정부의 지원이 많아야 하고, 기능성 자재에 대한 수요도 늘어 날 것 같다”며 “앞으로는 농작물 하나를 키우는 데도 사과는 비타민C가 많은 사과, 게르마늄이 많은 사과 등 고품질 농산물 생산에 필요한 자 재 공급이 늘어날 것 같다”고 전망했다. 


예컨대 대유에서 보급하는 게르마늄과 셀레 늄을 특화한 자재가 그런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는 것. 또한 사업에 따른 보조금 등 지원이 확대되면 이에 따른 친환경자재산업을 육 성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농사경험 계기 중원종묘농약사 참여  물고기가 물 만난 것처럼 일이 즐거워 

70년대 식량증산이 최우선 되던 시절에 권 회장도 업계에 진출했다. 권 회장은 “시골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농사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고 회고했다. 


농산업계에 들어오기 이전인 청년기부터 비 닐하우스 농사를 비롯해 고추·오이·상추 등 환금성이 높은 작물을 재배했다고. 그 후 군대를 제대하고 인쇄소 급사 생활을 거쳐 경 기도 이천에서 과수원 농사를 지었다.  권 회장은 “1972년 봄, 돌아가신 형님(권기 술)과 대구 현재철씨와 서울에 안기환 회장 등 세 사람이 종로 5가에 중원종묘농약사를 설립하면서 업계에 첫발을 들여 놓은 계기가 됐다”며 “중원농약사 점원 생활이 첫 출발인 셈”이라고 했다. 


“형님이 창업주이었지만 점 원으로 들어간 것은 어렸을 때부터 농사를 지 은 경험과 이천에서 과수원을 해본 경험이 작 용한  것 같다. 더 중요한 것은 농업을 아는 사람이 필요했고 일손이 모자라서 불려 올라 간 것이 시작이 됐다”고 했다. 특히 “시골에 자랐기 때문에 힘든 일에는 이 골이 나 있었다”며 “농사와 첫 직장을 인쇄소 급사부터 시작하는 등 어느 정도 훈련은 돼 있었기 때문에 힘이 든다거나 고통스럽다는 생각도 안했다. 일 하는 것이 즐거웠다. 고기 가 물 만난 것처럼. 내가 농사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권 회장은 “일이 재미있으니까 성과에 서도 차이가 났다고 했다. 일의 핵심, 즉 농업 을 알고 농민을 상대했기 때문에 성과 가 크고 빠르게 나타났다”고 했다. 일 을 할 때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 “내 경우에는 농사를 지어봤기 때문에 케이스가 달랐다. 농자재를 구입하러 온 농민과 대화가 됐다”며 “체험을 통 해 농업이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애로사항을 정확히 알 수 있었고, 그것이 큰 성과로 이어 지는 비결이 됐다”고 술회했다. 


농민과 대화가 된다는 것은 동질감을 느끼게 하면서 어려운 일에도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는 일이다. 그러한 공감대가 형성되니 교육을 해 도 산교육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교육 현장에 나가서도 이해를 높이는 교육을 하기 때문에 마다하는 농민이 없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 은 단순한 지식 전수에 그칠 수 있지만 경험을 통해 나오는 것은 질적인 면에 서 다르기 때문. 


발로 뛰면서 정직과 신뢰 쌓으며  후발주자 한계 극복 

이는 판매에서 강점으로 나타났다. 농약 판매는 도매와 소매가 동시에 이뤄 진다. “그때 당시 지방에서 농약을 살려면 종로 5가로 와야 했다”며 “국내에서 가장 크고 많은 농약사가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주 문이 들어오면 지방에 도매로 보내주면 소매로 판매하는 형식이었다”고 했다. 이런 흐름이 이어졌지만, 중원종묘농약사는 뒤늦게 도매상이 뛰어 들었다. 


다른 데보다 한 발 늦게 만들어졌으니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 요했다. “그런 상태에 생각해 낸 것이 직접 발로 찾아 가자. 왜 여기 앉아서 오도록 기다리느냐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가 솔선해서 간다고 했다.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도, 충청도 일원의 농약 종묘 소매상에 가서 중원종묘농약사를 소개하고 제품을 홍보하며 영업을 발로 뛰었 다. 만나서 설명하고 대화하는 것을 직접 담 당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병해충에 대한 정보는 물론 판 매방법 등 모두 체득하게 됐다”며 “가격도 그 야말로 적정가격으로 공급했다. 


이익을 크게 남기지 않고 우리가 적정마진만 보면 된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판매와 신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고 했다. 농약과 종묘 판매를 발로 뛰면서 노하우가 축 척됐다. “통상 농약 도매는 소비자가 찾아오 는 방식이었다. 사업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인데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은 오래 못간 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도 많고 비밀도 없는 게 시장이다. 


가격 등 결국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게 돼 있기 때문에 다른 방식 의 영업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직접 찾아가는 영업방식으로 전환을 하니 다 른 사업장에서 구입하던 사람들이 우리 중원 종묘농약사로 몰려오기 시작했다”며 “나중에 는 취급하는 농약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우리한테 없으면 구해서라도 갖다 줬다. 그야말로 정직, 신뢰로 운영했다고 말했다. 


대유화학에서 대유로 사명 변경 복합영양제 공급하며 비약적 성장 

잡초는 농민을 괴롭히는 적이라고 할 정도로 귀찮은 존재로 인식되면 서 제초제가 사용되기 시작됐다. “비료부터 시작된 농자재에도 변화 가 생기기 시작했다. 살균 살충제는 60년대부터 사용됐으나, 제초제는 70년 중반 사용하기 시작했다. 특 히 통일벼가 보급되면서 농약 사업 에 불이 붙었다”고 했다. 


대유화학도 그때 창립됐다. 지금은 친환경회사로서 선두를 유지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화학회사로 출발한 것. 회사이름도 지금은 주식 회사 대유이지만 설립당시에는 대유 화학으로 당시에 화학비료를 생산했 다. 그때 당시 비료 보급이 늘어나던 시기와 트렌드가 맞아 떨어졌던 것. 


권 회장은 “그때는 모두 화학비료 등 이 중심을 이루던 때였다. 정부에서 도 권장하고 그랬다”며 “창립 후 20 년이 지났을 무렵 대유로 회사명을 바꿨다. 마침 그때 토양산성화, 염류 집적 등 생리장해가 화학비료에 대한 엄청난 부작용으로 여기저기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비료가 보급되 기 이전까지 퇴비 넣고 고생하며 농사 짓다가 화학비료의 편한함에 잃게 된 것이 많은 것을 알게 된 시점도 그때인 것 같다”며 “한 20여년간 토양에 유기 물 공급이 안되면서 토양 산성화 등 생 리장해 부작용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토양에 건강한 미생물이 줄어들고, 붕소·마그네슘· 등 미량요소 부족해 토 양 밸런스가 깨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권 회장은 “퇴비로부터 공급받아야 할 것들을 놓쳐버렸으며, 이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안되 면서 오남용에 따른 문제도 심각해지기 시작 했다”고 했다. 이어 “이러한 문제가 확장되면 서 복합영양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 다”며 “식물에 필요한 16대 원소에 각종 미량 원소를 넣은 비료를 만들기 위해 대유화학을 설립했고, 농민들이 많이 사용했다. 그러면서 대유가 성장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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